오월의 들녘 - 존재하는 동안 -

임 재 영

 
'계절의 여왕' 오월입니다. 만물은 겨울의 단조로운 색감(色感)을 벗어나 부활의 생명을 한껏 뿜으며 연녹색으로 단장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연한 은빛과 회색 빛이 어우러진 산들이 서서히 대지의 열기로 아늑하게 보이고 창문 밖 가까이의 앞산은 이미 여름 색으로 치장을 마쳤습니다. 차가운 대지 위에 서서 태고의 고독을 음산한 바람과 함께 휘감고 있던 겨울나무 마른 가지는 이미 새 잎으로 채워졌고, 높새 바람에 삐걱거리던 어느 농가의 비닐하우스 안에는 푸른 상추가 탐스럽게 문명에 지친 눈을 자극합니다. 올 해 첫날 얼음 밑으로 둔탁한 물소리밖에 들려주지 않던 개울에는 녹색 이끼 낀 조약돌 위로 흐르는 맑은 개울물이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의 발목을 시원하게 적시며 흐릅니다. 오월의 대지는 그야말로 새생명의 축제입니다. 우리네 정서가 담긴 동요 "고향의 봄"이 시골소년의 도화지 위에 옮겨진 듯 오월의 들녘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이 차곡차곡 담겨있습니다. 그 소박한 정취대로 조용히 다가와서 우리네 마음을 채우는 들풀들과 바람에 하늘거리는 노란색 애기똥풀이 귀엽고 정겹습니다.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룬 들녘에는 참새들이 재잘거리며 춤을 춥니다. 젖소를 치는 농장으로부터 거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오월의 푸른 향기에 취한 제 코를 깨웁니다. 어린 싹이 덮은 흙을 밀치고 고개를 내민 길가의 상추밭은 마치 모자이크화 같습니다. 오월의 대지는 우리네 마음의 고향일 뿐 아니라, 저 하늘 너머 영혼의 고향으로부터 내려온 새생명의 자취와 피조물의 조화로운 삶을 보여줍니다. 작은 파 꽃 옆에 핀 씀바귀 한 송이가 외롭지 않게 보입니다. 백록색 파꽃 위에서 꽃잎을 헤치고 꿀을 빠는 꿀벌들의 잰 날갯짓에서 성숙한 봄을 느낍니다. 여기저기 눈에 띄는 냉이꽃이 그 가냘프고 수수한 자태로 들녘을 조용히 꾸밉니다. 모판이 가지런히 정렬된 논을 보니 인위적(人爲的)인 질서는 눈에 쉽게 띄지만 신비가 없고 대자연에 깃들인 하나님의 질서를 흩뜨리는 것 같습니다. 길가에 들어진 단풍나무 잎 밑에 숨어 핀 당단풍꽃의 연둣빛 잎 끝을 물든 옅고 붉은 물감은 감추어진 자연의 아름다움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새소리와 개울물소리와 미풍(微風)이 나뭇잎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와 동네 개짓는 소리는 주님이 주신 우리네 고향의 심포니입니다.  

들풀과 들꽃

주님의 창조의 신비를 말없이 증거하는 이 자연을 더럽히는 행락객의 요란한 괴성과 광란의 유흥은 미물(微物)만도 못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느 집 문 앞을 지키는 수수꽃다리(라일락)의 향기가 제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대문 옆에는 한낮에 활짝 피고 저녁이면 꽃잎을 닫는다는 진분홍빛 모란꽃이 마치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을 못 보는 인간들의 교만과 무지를 일깨우듯 만개한 자태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길 건너 수국(水菊)의 모여 핀 풍요로운 고결한 자태는 참된 믿는이들의 모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 작은 꽃잎들 사이에 사랑이 가득합니다. 수국 아래 시선을 받지 못하며 먼지에 덮혀있는 토끼풀의 흰 꽃에 요란한 무늬의 나비가 날아와 앉으며 그 외로움을 달래줍니다. 계곡에 접어들면서 골짜기 냇가에 무성한 마른 갈대와 노란색 산괴불주머니가 좁게 난 길 옆으로 핀 쪼끄마한 양지꽃과 정답게 어울려서 오랫동안 눈길을 머무르게 합니다. 좁은 오솔길을 덮는 잡초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발걸음 밑에 시선을 주의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보라색 호제비꽃이 "분량(measure)"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 작은 꽃은 인적이 드문 오솔길에서 주님이 주신 분량만큼 말씀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드문드문 여러 작은 꽃이 한 꽃을 이룬 조팝나무 흰 꽃이 새생명을 가진 자녀들이 서로서로 사랑하며 세워주며 모이는 모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 그 정겨운 순결함을 한 꽃으로 증거합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자연은 그분의 어떠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풀 위에 앉아 땀을 식히니 벌써 여름을 재촉하는 듯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귀를 모으게 합니다.

창조와 구속의 중심이며 목적이신 주님  

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에 의하여(by)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그리스도는 하늘들과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히 1:10)(시 102:25). 주님께서는 하늘들을 휘장 같이 펼치셨으며, 땅의 기초를 놓으시어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습니다(시 104:2,5).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 바로 아들 안에서 아들에 의하여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물 안에 흐르는 모든 생명은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지금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으며 그분에 의하여 존속하고(consist) 있습니다(골 1:17). 만물이 그분에 의하여 존속한다는 것은 그분이 만물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물이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음은 만물이 존재하는 목적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히 1:3).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만물과 화해하셨습니다(골 1:20). 그러므로 주님은 창조의 중심이요 구속의 중심입니다. 실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 3:11). 주님은 창조와 구속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의 말씀을 맛본 자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나무가 손뼉을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사 55:12).

주님의 아름다움이 담긴 자연과 교회

골짜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깊습니다. 이 계곡물의 근원은 하늘에 있는 주님의 방(chamber)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분의 방에서 물을 부어 주십니다(시 104:13). 주님께서는 골짜기에 샘들(springs)을 보내시어 계곡 사이로 그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시 104:10). 이는 주님께서 이 땅을 찾아오셔서 물을 대 주시는 것입니다(시 65:9). 계곡물을 막기 위하여 쌓아 놓은 돌 둑 사이로 떨어지는 계곡물이 고인 물과 돌 위에 떨어지며 만드는 흰 물보라가 제 마음을 정결케 합니다. 돌들로 쌓아서 세운 작은 둑에서 주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교회를 봅니디. 둑을 세우는 각 돌들은 생긴대로 서로 꼭맞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생긴 대로, 곧 주님이 주신 분량대로 서로 나누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짜여져 존재합니다. 그 돌들은 주님이 빚은 대로 존재할  뿐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시기도, 분쟁도, 다툼도, 헐뜯음도, 헛된 영광을 구하는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고전 3:3)(갈 5:26)(빌 1:15). 주님의 아름다움은 어떠한 인위적인 것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오직 주님에게서 나와서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그 영광이 돌아가는 창조와 구속에 있습니다. 주님의 아름다움은 창조의 아름다움이요, 구속의 아름다움입니다. 자연은 이렇게 덜함도 더함도 없는 겸손으로 그분의 신실하신 말씀을 증거하며 주님의 어떠하심을 증거합니다. 모든 만물은 다만 주님이 빚어주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며, 그분의 어떠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으로 그대로 존재하고, 지금껏 변함없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ordinances)를 따른 것입니다(시 119:91).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늘에 굳게 세우셔서 보존하신 순결한 말씀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완전하게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그분의 말씀의 신실함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연은 유기적인 조화를 통해 주님의 창조와 구속의 뜻과 목적이 담긴 교회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이 자연이 우리네 인생에게 주는 권면은 바로 주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겸손과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신실함과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증거하는 [하나]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뛰어난지요

길가와 냇가 옆 언저리와 둑길과 들녘과 두둑사이의 고랑과 이랑 사이에, 마치 아무렇게나 이 땅에 던져진 것 같이 무성한 질경위와 씀바귀와 소리쟁이와 바랭이, 망초, 비름, 가막사리, 메풀들이 교만한 인생들에게는 무명한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주어진 것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거부하거나 시기하거나 다투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신실한 종으로 주님의 이름의 뛰어나심을 증거합니다(시 119:91). 들꽃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아름다움의 터에 바로 이러한 이름이 나지 않은 잡초들이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인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이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정해주신 땅 위에서 주어진 것만큼 서서 주신 이름을 지킬 뿐입니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결국 한 이름을 높일 뿐입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이름을 높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기의 것으로 주님의 것을 탈취하고 주님의 이름대신 자기의 이름을 얹어 놓지만, 자연은 주신 이름을 이름만큼 지킬 뿐입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를 지으신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겸손과 신실함과 순결함과 그들 안에 깃들인 주님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보며 겸손히 주님을 경외하며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연이 그러하듯이 주님의 신부인 교회가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점이나 주름이 없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단장한 신부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엡 5:27)(계 21:2). 이것이 그분의 몸 안으로 부르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땅한 응답일 것입니다.

존재하는 동안

귀가길에 간간이 개머루가 눈에 띕니다. 늦가을 바람결에 그 서걱거리는 소리로 지난 시간들 속에 담긴 정겨운 이야기를 들려줄 떡갈나무의 푸른 잎이 벌써부터 그 이야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산등성이에는 바쁜 일손으로 밭을 가는 농부와 아낙내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버드나무가 지는 해를 등지고 따뜻한 하늬바람에 솜씨를 날립니다. 고추밭 고랑 사이를 뒤뚱거리며 동네 개가 지나갑니다. 보리밭 위로 마치 파도타기를 즐기는 듯 참새 떼가 현란한 비행을 합니다. 냇가로 맑은 물을 적시려 내려가면 코를 찌르는 그 생명의 내음새 - 개울가를 따라 난 잡초와 함께 나란히 심어진 콩의 떡잎이 미풍에 하늘거립니다. 가끔 눈에 띄는 지느렁이 엉겅퀴가 애기똥풀과 어울려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얼마전 산행(山行)에서 본 시골처녀같은 괭이밥의 노란색 꽃과 물초롱의 앙증스러운 고결한 자태와 붓꽃의 수줍은 미소가 다가옵니다. 만물은 이렇게 주어진 분량을 지키며 자신들을 창조하신 주님의 말씀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아름다움을 겸손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들녘과 골짜기와 작은 산들은 자연 속에서 그들대로 즐거워서 외치며 노래합니다(시 65:13). 이 모든 것은 시간 시간마다 주님께서 그분의 선하심(goodness)으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 가운데를 거니시며 비옥함(fatness)으로 적셔주시기 때문입니다(시 65:11). "오 주여, 주의 행하신 일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것들을 다 만드셨사오니, 주의 부요하심이 땅에 가득 하나이다"(시 104: 24). 경외심으로 가득한 귀로(歸路)의 제 기도는 어쩌면 이 땅을 지나간 순례자들이 수없이 드렸던 찬양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 주께 노래하며, 존재하는 동안(while I have my being) 내 하나님께 찬송하리로다"(시 104:33). 존재하는 동안 ....